
불량연애_도덕적 딜레마속 재미에 대해 (25.12)

문득 <불량연애>라는 프로그램이 근래 인기라는 숏츠 같은 것을 보게 되었다. 불량연애가 뭐지? 일본 양아치 출신들이 나오는 연애 프로그램이란다. 처음 숏츠나 릴스로 발견했을 때 야쿠자들이 나와서 뭔가 진지한 구애 같은 것을 하는 모습이 비주얼 충격처럼 다가오기도 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애초에 연애프로그램, <나는 솔로> 같은 것들이 아무리 인기였어도 나는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재미가 있었긴 하지만, 그것을 보는 것에 어떤 괴로움을 느낀다. 표현이 과할 지 모르겠지만, 연애라는 행위를 통해 그 인간을 관찰하고 재미를 찾으려는 모습에 약간의 자괴감 같은 게 있지 않는가.
관음을 넘어선 무엇인가. 관찰하는 이와 관찰 당하는 이로 구분되어지는 프레임으로 인해, 시청자들은 어떤 절대적인 위치에서 출연자들을 지켜보게 되는데 나는 그것이 묘하게 불편했다. 그건 사실 꼭 연애프로그램만이 아닌 짧지 않은 시간 많은 미디어들이 그래왔지만, 나의 경우에는 특히나 연애 프로그램이 그랬다. 아무래도 사랑과 애정이라는 것이 조금 성스럽게 인지화 되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단순하게 출연자들의 설레는 감성을 대리만족 하는 정도라면 나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데(더욱이 혼인율과 출산율이 낮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순기능이라 생각하는데) 매회 빌런이 등장하고, 아예 이번 회차에는 누가 빌런일까 농담처럼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 불편한 것이다. 그 빌런이라는 것을 찾는 것이 어떤 대중에게 콘텐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대중이 그것을 나름의 도덕적 잣대로 평가를 하는 것을 보고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나니 이런 관찰 예능을 보는 것이 가학적으로 느껴 지기도 했다. 더욱이 요즘의 연애 예능은 출연자들이 있고 이들을 우선적으로 관찰하는 패널이 따로 있는 경우가 흔한데, 이런 패널들의 반응이 더욱 시청자들의 가치 판단을 흐트려 놓는다고 생각했다. 어떤 실수를 저지른 남성 출연자들을 보며 화를 내는 패널을 따라, 그 방송을 보는 나도 따라서 화를 내게 된다. 패널들로 인해 1차로 여과된 감정이 시청자들을 죄책감이나 어떤 감정적 윤리에서 다소 벗어나게 만든다. 나는 이런 과정을 일약 욕해주세요 프로세스라고 표현하고는 한다. 시청자들은 결국 여과된 그 감정들을, 마치 순수 증류된 메탄올처럼 받아들이며 감정적인 고양 상태를 가진다. 그것은 일종의 쾌감을 자극하여 도파민을 분출하는 것이다. 마치 매운 떡볶이를 먹고 괴로워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그러나 문제는 매운 음식은 캡사이신과 탄수화물이겠지만 미디어속에 나오는 이들은 사람이라는 인격체라는 것이다. 시청자를 자극하는 목적을 위해 미디어는 한 명의 인간을 재단하고 가공하여 시청자에게 제시한다. 나는 나 역시 그런 과정에서 도파민을 분출해내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못내 불편해 있었다.
서문이 길었지만 불량연애로 다시 돌아와서, 이 방송 역시 그런 감정을 터트려 도파민을 충족시키는 구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전제는, 이 방송은 관찰을 통한 시청자의 고양상태를 아예 대놓고 의도하며 장치화 하였다는 것이다. 괜찮아. 화내도 돼. 어이없어 해도 돼.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아름답지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불우한 가정환경 등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이들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에 따른 어떤 대가를 받은 것이 마치 세상에 뒤처진 것처럼 표현이 된다. 그래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기보다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처럼 연출이 된다.
출연진들은 타투는 기본에 방송 전제에 음주와 흡연을 거의 권장하다시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어떤 인원들은 소년원 출신이라고 한다. 특히 그 기간을 보면 결코 경범죄라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가령 모 출연자의 경우 소년원에서 2년을 있다 나왔다고 하는데 찾아보니 이정도의 형량이라면 살인, 강도, 성폭력과 같은 흉악범죄일 수 있다고 한다. 결코 어느 하나도 보편적인 사회에서는 쉬이 넘어갈 수 없는 범죄이다.
더욱이 방송에 나오는 장면도 그렇다. 첫 장면부터 임팩트 있게 시작하는 두 남성 출연자가 나오자마자 시비를 붙는 장면이다. 시작한지 몇 분이 채 안되어 서로 너는 뭐야! 라며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또 예쁘다고 인기가 많은 출연자가 특정 출연자를 상대로 죽일듯이 째려보더니 물을 뿌린다. 패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들을 보며 웃는다. 이것이 일본의 만담 중 바보 같은 상대를 놀리는 츳코미 역할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출연자들을 마치 이들을 어린 아이 대하듯 멘트를 친다. 순수한 어린 아이가 아닌 어리숙한 이를 대하는 것처럼.
결국 이 프로그램 또한 관찰 예능이라는 영역에서 시청자가 품을 수 있는 어떤 감정의 방향성을 극대화 시킨다. 특히나 출연자들의 행동은 다소 과잉 되어있다. 이는 출연자들이 사회로부터 융합될 수 없는 이들인 것처럼 지속해서 이미지를 만든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런 불량 문제, 특히 야쿠자 문화 같은 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한 형태로 이들을 표현시키며 지속적인 평가 절하의 상황을 연출한다. 저렇게 사회적으로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 음지에서 존재하는 사람이 햇빛 아래에 나와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은, 자신들의 웃는 행위가 가진 모종의 윤리적 딜레마를 희석한다. 저렇게 뒤쳐진 행동을 하는 것은 저들이 불량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런 지점 정도로는 깔깔 거려도 돼. 프레임 밖에서 프레임 안에 가지게 될 일종의 양심적 가책을 상당히 줄여준다.
그리고 회차가 진행될 수록 기술이 나온다. 단순히 과거의 범죄자들을 이지매 하는 것으로 끝나진 않는다. 방송은 매 화 진행될 수록, 거친 것은 순수하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쌓아 올린다. 드라마로 조금씩 포장되어간다.
출연자들이 애정이라는 감정을 표현해 가기 시작하며 마치 가뭄에 내리는 단비 마냥 표현이 된다. 그의 불우했던 과거사에 상대의 존재를 대비시킨다. 프로그램의 방향 상 불량과 불편함이 과잉 되면 될수록, 오히려 그들의 로맨스는 부각된다. 우리의 일상에 가까운 캐릭터들은 출연양이 줄어드는 기분이다.
이 프로그램은 너무나도 전통적인 클리셰를 따라가고 있다. 그러한 과거를 가졌던 인물이, 지금도 사회의 보편적 구조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물도 결국 사랑을 느낍니다. 너무나도 전통적인 클리셰기 때문에, 방송에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 드라마에 홀딱 빠져 있게 된다.
타투로 온몸을 뒤덮은 남자가 허세를 부리며 마치 고릴라 마냥 여성들에게 존재감을 내비치던 모습은, 곧 골목대장이었던 꼬맹이가 수줍음을 품은 애처로운 상으로 변해간다. 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는 모습이나 갈등이나 실수하는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연민을 불러낸다. 어느덧 이들의 캐릭터에 빠져들어간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이중에 마음에 드는 인물을 고르고 응원하거나 혹은 마음에 들었다가 배신감을 느낀다던가, 혹 저런 타임은 마음에 안든다며 그 이유를 풀어놓는 등 어느덧 미디어와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해 간다. 아 이 어리석은 중생이 고난을 통해 행복으로 향해 가고 있구나. 방송의 패널이나 시청자들이나, 그리고 나 또한 프레임 밖에 안락한 쇼파에 앉아 그것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최종화로 갈수록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문제아가 아닌 사랑을 위해, 아니 평범하고 행복한 인생을 꿈꾸는 한 개인이 되어간다. 시리즈의 초중반에 그들을 비소하고 냉소적으로 봤던 시청자들은, 이제 이들을 품어줄 기회가 오는 것이다. 아 반감이 들 정도로 잘 만들었다. 정말 노골적으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소 꺼려질 정도로 유도된 그들의 캐릭터는 전혀 알 수 없는, 그저 상상만 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인간사를 극복해 나가며 사랑을 찾아가기에 우리는 어느덧 응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최종화를 놔두고 있다. 최종화가 나왔다고는 하는데, 심지어 최종화에 대한 스포일러까지 의도치 않게 알게 되었지만 보고 싶지 않다. 사실 갱생 같은 과정까지 바라지도 않았다. 아니 그런 광경을 보면 너무 불편해질 것 같았다. 너무나도 뻔하지 않는가. ‘과거가 있는’을 매개로 삼아 그들이 매도되는 상황을 통쾌하게 봐놓고 어느덧 너를 인정해! 행복해야 해! 를 바라고 있는 내 마음이란.
사실 이런 프로그램 또한 나름 각본으로 각색되는 미디어라는 것을 인지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그들의 캐릭터를, 나와 주변의 인간상으로 대조해가며 감상하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재미와 나아가 감동까지 만들어내는 것이 참으로 교묘한 이야기 기술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도 뻔하게, 우리는 왜 타인에 대해선 지극히 너그러워지고 그들의 성장기를 통해 감동과 재미를 얻는 것인가? 저 사람이 과거에 나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누군가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고 또 어딘가 에서는 불편함을 끼치는 인물일 수도 있음에도, 그가 사랑을 갈구하는 그 과정들에 나는 한 인간으로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 참 묘하게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을 마무리하며 최종화를 일부로 안보고 있는 지금, 나는 나름 응원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들의 삶이 잘됐으면 하는 묘한 훈훈함으로 핸드폰을 놓지 못하게 된다.